[리뷰] KBS 시트콤 빌런의>
[이진민 기자]
1990년대를 달군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에요"라는 광고 문구만큼 가부장제를 보여주는 문장이 없다. 남자의 행실과 가정의 행복은 전적으로 여성에게 달렸다며 막중한 책임과 순종적인 태도를 요구하는 K-가부장제의 참맛을 응축했기 때문이다. 남편이 어떤 사람이든 아내가 살뜰히 보살피면 괜찮다니, 내조의 힘이란 이토록 대단하던가.
이제 그 내조를 남편에게 요구하는 여자들이 나타났다. 술에 취해 진상 짓을 해도, 운전하고 주유를 깜빡해도, 갑자기 입주민 대표 선거에 출마해도 남자들이 알아서 센스 있게 해결하기를 원하는 아내들. 막무가내 '가모장' 캐릭터에 남자들은 쩔쩔맨다. 시트콤계의 가부장적 역사를 바꾸겠다는 KBS <빌런의 나라>, 역시 여성 서사는 여자 캐릭터 만들기 나름이다.
아줌마들의 억척스러움, 새로 탄생한 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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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런의 나라> 화면 갈무리 |
ⓒ KBS |
옆집 사는 '오나라(오나라)·오유진(소유진)' 자매는 각자 방식대로 남편을 휘어잡고 산다. 나라는 뻔뻔함으로 남편 '현철(서현철)'을 제압한다. 남편이 싫어해도 화장실 문을 연 채 볼일을 보고, 남편의 코끝을 자극하는 복슬복슬한 차량 핸들 커버를 고집한다. 현철이 반기를 들며 "당신의 옷장을 내 서재로 바꿔달라"고 해도 "그러면 가족들 옷 다 갖다 버리자"며 옷더미를 살벌하게 내던진다.
유진은 깐깐함으로 남편 '진우(송진우)'를 통제한다. 반드시 변기는 앉아서 사용하라는 유진의 말에 진우가 "써서 쌀 권리를 달라"고 요구하자 손수 깔때기를 건네고, 채소 반찬을 꺼리는 진우를 식탁에서 혼쭐낸다. "가장을 대체 무엇으로 보냐"는 진우에 "가장 문제인 존재"라며 "너 때문에 멀쩡한 집 놔두고 월세살이한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남편에게 엄격하게 굴며 동시에 완벽한 내조를 받는다. 나라와 유진이 싸움을 벌이면 남편들은 알아서 집 밖으로 나간다. 그러고는 추위에 덜덜 떨며 자녀들에게 문자를 보내 아내들의 기분을 전달받고, 싸움을 끝낸 아내들이 만취하자 술주정을 받아내느라 바쁘다. 마치 여성 캐릭터들의 행동 패턴이 탑재된 듯 남편들은 아내의 감정에 맞춰 적절히 대처하고 그들을 위해 몸을 내던진다.
또한 나라와 유진이 대뜸 입주민 대표 선거에 출마하며 "당장 연차 내고 달려오라"고 하자 그들은 어떠한 반대 없이 집으로 향한다. 그리고 열성적으로 선거 운동에 나서는데, 진우는 아내의 이름을 개사한 선거 로고송을 부른다. 진우가 핏대 세우며 노래할 때 현철은 허리를 깊이 숙이며 아내의 얼굴이 담긴 포스터를 뿌리고 치어리딩을 선보인다.
극 중에서 나라와 유진은 아줌마 캐릭터의 전형적인 특징을 지닌다. 그들은 오지랖이 넓고, 자녀 교육에 열성적이며, 쥐 잡듯 남편을 잡는다. 하지만 이는 조롱거리가 아닌 실질적인 힘으로 작용해 주변 인물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 나라는 특유의 오지랖을 발휘해 남편을 하대하는 상사의 불륜을 폭로하고, 유진은 전교 1등인 아들을 스펙 삼아 선거판을 흔든다. 아줌마의 극성이 권력이 되는 곳, 그것이 <빌런의 나라>만의 역학이다.
남성성의 추락, 웃음 코드로 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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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런의 나라> 화면갈무리 |
ⓒ KBS |
<빌런의 나라>는 다양한 방식으로 남성 캐릭터들을 무너뜨리며 시청자에게 웃음을 준다. 먼저 남편들은 가장의 권위를 잃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인다. 현철은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성교육을 시키겠다며 함께 헬스장에 간다. 그러나 정작 여성 회원을 의식하며 그에게 잘 보이겠다고 무리하게 운동하다가 다치는 건 현철이다.
진우는 유진의 선거 캠프를 돕다가 상대 팀의 비방 공세에 자신이 과거 술에 취해 냉장고에 소변을 봤다는 사실을 들킨다. 이 사실이 아파트에 퍼지자, 이웃집 아이들은 '오줌싸개'라 놀리고 결국 얼굴을 꽁꽁 가린 채 다니게 된다. 또한 장인어른의 전시 출품을 돕기 위해 석고 분장을 하고서는 소변을 참지 못하는 유아적인 실수를 벌이기도 한다.
아들 캐릭터도 웃음에 한몫 보탠다. 나라의 아들 '영훈(정민규)'은 학급 회장에서 당선됐지만, 바보 같은 면모를 숨기지 못한다. 인기 많은 여자 학생에게 잘 보이겠다며 무리하게 팔굽혀펴기 대결을 펼치고, 제대로 회장 일을 하지 못해서 다른 학생들에게 꾸지람을 듣는다. 자신이 탄핵당하길 원하며 무리한 학급 정책을 펼치다가 되려 '선행상'을 받으며 우울한 표정으로 회장직을 지킨다.
<빌런의 나라> 속 남성 캐릭터들은 남성성을 드러낼 때마다 추락한다. 가장으로서 아내에게 권위를 내세우면 가차 없이 집에서 쫓겨나고, 남자로서 여성에게 어필하려 하면 몸을 다치거나 위신을 잃는다. 이러한 장면들은 오자매의 당당한 행보와 대조하며 문제적인 남성성을 꼬집고 가부장적 코미디를 깨기 위한 <빌런의 나라> 제작 의도를 강조한다.
K-시트콤의 가부장제 혁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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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풍 산부인과>에서 무능력한 가장 역할을 맡은 배우 박영규. |
ⓒ SBS |
사실 한국 시트콤은 가부장제를 서서히 타파하며 성장했다. 1998년 <순풍 산부인과>는 권위적인 애처가 '오지명'과 경제적으로 무능력한 가장 '박영규' 역할을 통해 허점이 많은 가부장 캐릭터를 선보였다. 2006년 <거침없이 하이킥>에서는 가족에게 AV 시청을 들키는 할아버지 '이순재'와 아내에게 모든 걸 기대는 '이준하'가 등장했다. 이후 방영된 시트콤에서도 권위적이지만 무능력하고 집안에서 소외된 가부장 캐릭터들이 나왔다.
그간의 작품들은 가족 내 공고한 남성 권력관계를 깨는 방식으로 웃음을 자아냈다. 그러나 권력의 중심을 남성에서 여성 캐릭터로 재편하거나 남성성을 완전히 풍자하지는 못했다.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빌런의 나라>는 빌런처럼 여겨질 만큼 뻔뻔스럽고 억척스러운 여성 캐릭터들을 내세워 '가모장제' 시트콤에 도전하고 있다.
물론 어설픈 서사 전개와 모호한 웃음 포인트가 얼기설기 얽혀 완성도 면에서 아쉬움은 있다. 하지만 여성 캐릭터의 신선함을 즐기는 것만으로 60분이 훌쩍 지난다. 겨우 2화만 공개됐으니 아직 갈 길이 멀다. <빌런의 나라>는 시들었던 시트콤 유행을 이겨내고 흥행 깃발을 꽂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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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런의 나라> 포스터 |
ⓒ KB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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