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테니스 영웅이 된 왼손잡이 이알라의 폭발적인 포핸드 스트로크. 바볼랏 인스타그램
- 자국 대통령, 언론의 찬사가 쏟아져
- IMG 와일드카드를 통해 스타 등용문 통과
- 메이저대회 자력 출전으로 상승세 유지
- 코리아오픈 출전할 지도 뜨거운 관심
“2025년 마이애미 오픈에서 역사적이고 놀라운 활약을 펼친 테니스 신동 알렉산드라 이알라에게 축하를 전하고 싶다. 필리핀 선수가 어떤 사람인지 세상에 보여줬다. 결단력 있고, 흔들리지 않으며, 어떤 도전에서도 물러서지 않는 인물이었다. ”
페르니단드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은 자국의 한 테니스 선수를 향한 극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또 “더욱 중요한 것은 알렉스의 전례 없는 업적이 모든 사람, 특히 일상의 도전에 같은 용기와 결의로 맞서는 평범한 필리핀인에게 영감을 준다는 점이다. 우리는 알렉스의 희생과 명예와 영예를 향한 노력에 감사하는 데 있어 온 나라와 하나가 되었습니다”라고 칭송했습니다.
만 19세 소녀 알렉산드라 이알라가 라켓 하나로 필리핀 영웅이 됐습니다. 이알라는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가든스에서 열린 여자프로테니스(WTA)투어 마이애미 오픈에 와일드카드로 출전해 강호들을 연파하며 4강까지 올랐습니다.
필리핀 정부와 현지 언론은 이알라의 쾌거에 열광하고 있습니다. 마닐라 타임스는 그녀를 신데렐라에 비유하며 꿈의 행진을 펼쳤다고 보도했습니다. 필리핀 대통령 홍보실(PCO)은 “최고를 향한 여정에서 일련의 좌절을 극복했다. 순수한 끈기를 통해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우리 필리핀인들은 알렉스와 같다. 우리는 모두 가장 힘든 환경에서도 끈기 있게 버텨낸다. 전 세계에서 가장 혹독한 환경에서도 번창하고 탁월하다”라고 논평을 내보냈습니다.
<사진> 마이애미오픈에서 오스타펜코를 꺾은 뒤 악수하고 있는 이알라. 테니스채널 인스타그램
세계 랭킹 140위 이알라는 비록 결승 문턱에서 아쉽게 세계 4위 제시카 페굴라에게 막혀 발길을 돌려야 했지만 8강전에서 세계 랭킹 2위 이가 시비옹테크(폴란드)를 제압한 것을 포함해 메이저대회 챔피언 출신 선수를 3명이나 연파했습니다. 64강전에서는 2017년 프랑스오픈 우승자로 코리아오픈 정상에도 올라 국내 팬에게 친숙한 엘레나 오스타펜코(세계 25위)를 2-0(7-6, 7-5)으로 제압했습니다. 필리핀 선수가 세계 25위 이내 선수를 제압한 것은 처음입니다.
이알라는 더욱 기세를 올려 32강전에서 호주오픈 챔피언이자 세계 랭킹 5위인 미국의 매디슨 키스를 2-0(6-4, 6-2)으로 완파했습니다. 당연히 필리핀 선수 최초의 ‘톱5’ 상대 제압이었죠. 메이저대회 우승자 출신 선수를 3명이나 꺾은 것도 대단한데 그것도 한 세트도 내주지 않았으니, 혀를 내두를 만합니다.
이알라가 이처럼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데는 와일드카드로 출전 기회를 잡았기 때문입니다. 마이애미오픈의 주관사는 세계적인 스포츠 엔터테인먼트 기업인 IMG인데 이알라의 매니지먼트업체이기도 합니다. IMG는 젊고 유망한 선수에게 마이애미오픈 본선 출전 자격을 부여했는데 올해는 이알라가 ‘골든 티켓’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최근 국내 한 주니어대회에서도 토너먼트 디렉터였던 임규태 감독이 와일드카드로 지목해 출전한 선수가 우승까지 하는 사례가 있었습니다. 와일드카드의 중요성도 다시 한번 부각되고 있습니다. 국내 어떤 특급대회의 경우에는 와일드카드를 돈벌이의 수단으로 쓰기도 합니다. 수천만 원을 내야 받을 수 있는 것이죠. 와일드카드가 유망주의 등용문이 될 수 있도록 더욱 세심한 선정 과정이 필요해 보입니다.
<사진> 이알라가 ‘흙신’ 라파엘 나달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ITF 홈페이지
2005년 5월에 태어난 이알라는 테니스광인 할아버지 영향으로 4세때부터 라켓을 잡기 시작했습니다. 이알라의 어머니는 필리핀 최고의 수영 선수 출신으로 현지 유수의 통신회사 임원이었다고 합니다. 비교적 넉넉한 가정환경을 지닌 그는 특별한 운동 유전자와 재정 지원을 통해 테니스 스타의 길에 접어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농구가 최고 인기 스포츠이고 테니스는 불모지나 다름 없던 필리핀에서는 제대로 날개를 펼 수 없었습니다. 12세 때 프랑스 주니어대회에서 우승하면서 라파엘 나달(스페인)이 주는 장학금을 받게 된 게 인생의 전환점이 됐습니다. 13세부터는 가족의 품을 떠나 스페인 마요르카의 나달 아카데미에서 기량을 키워갔습니다.
이알라는 2022년 US 오픈 주니어 여자 단식에서 우승했습니다. 필리핀 선수로는 사상 처음이었습니다. 18세 때인 2023년 필리핀 대표로 항저우아시안게임에 나가 여자 단식과 혼합복식 동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필리핀 여자 테니스 선수가 아시안게임 시상대에 오른 것은 1966년 이후 57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지난해 파리 올림픽 여자단식에서는 동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이번처럼 필리핀 선수가 WTA 투어 4강에 오른 것도 이알라가 처음입니다.
필리핀 테니스 역사를 조목조목 바꿔나가고 있는 그를 보면 과거 박세리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박세리가 1998년 US여자오픈에서 맨발 투혼 끝에 정상에 오른 뒤 영향을 받아 골프에 매달려 성공한 ‘세리 키즈’가 쏘아졌습니다. 이알라 역시 필리핀뿐 아니라 아시아 테니스의 본보기가 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나오고 있습니다.
<사진> 보그의 표지 인물로 소개된 이알라. 이알라 인스타그램
175cm의 큰 키에 왼손잡이인 이알라는 최근 침체를 겪고 있는 한국 테니스에도 시사점을 주기에 충분해 보입니다. 과거 한국 테니스 역시 메이저대회 주니어 준우승, 우승을 차지하며 유망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사례가 있으나 성인 무대에서는 조용히 사라지곤 했습니다. 이알라의 성공 사례는 좋은 본보기가 되기에 충분해 보입니다. 스타성을 인정 받은 이알라는 보그의 표지 인물로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사용하는 라켓은 바볼랏의 ‘Pure Aero 2023’입니다.
페굴라는 이알라에 대해 “정말 상대를 힘들게 한다. 각도를 잘 활용하고 경기 도중 코트를 아주 넓게 본다. 왼손잡이여서 더욱 까다롭다”라고 평가했습니다. 상대 코트에 낮게 깔리는 플랫 스트로크와 드롭 샷, 왼손 슬라이스 서브 등 다양한 공격력을 갖췄습니다.
이알라는 다음 주 세계 랭킹 100위 이내 진입해 70위까지 점프할 전망입니다. 올 시즌 남은 메이저대회인 5월 프랑스오픈, 6월 윔블던, 8월 US 오픈 본선에 자동 출전하게 됐습니다. 더 날아오를 날만 남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주위의 찬사에도 이알라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여전히 배고프고, 여전히 동기를 부여받고 있다”라고.
사족 한가지. 9월 WTA투어 코리아오픈이 열리는 서울 올림픽코트에서 이알라를 볼 수 있을까요. 성사가 된다면 분명 흥행카드가 되고도 남을 겁니다. 끝으로 혹시 궁금하실까 봐. 마이애미오픈 우승은 아리나 사발렌카에게 돌아갔습니다.
김종석 채널에이 부국장(전 동아일보 스포츠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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