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 개봉과 더불어 극장가 강타… 흥행 조짐
미묘한 감정선, 반상(盤上)에 투영… 공감대↑
일상 내 바둑 용어 적지 않아… 인생 궤적과 유사
마지막 종료 직전까지 이변 가능성… 긴장감 UP
고 조남철 9단에서 신진서 9단까지 천재 계보세계 바둑계의 살아 있는 전설인 조훈현 9단과 이창호 9단 사이에서 벌어졌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 ‘승부’엔 제자와 대결에서 패한 이후, 타고난 승부사 기질로 다시 한번 정상 도전에 나선 조 9단의 반상(盤上) 여정이 담겼다. 영화에선 조 9단 역할은 배우 이병헌(왼쪽)이, 이 9단의 어린 시절은 김강훈(오른쪽)이, 성인은 유아인이 각각 열연했다. 바이포엠스튜디오 유튜브 캡처
‘미생(未生)’ ‘응답하라 1988(응팔)’ ‘더 글로리’ ‘세작(첩자), 매혹된 자들’.
장르는 각양각색이다. 오피스 사회고발에서부터 코믹과 스릴러, 사극 등을 포함해 다양하다. 공통분모도 있다. 최근 비공중파에서 송출됐지만 탄탄한 줄거리로 안방극장을 달궜던 흥행작이란 부분이다. 극중 소재에 모두 ‘바둑’이 등장했단 사실은 또 다른 볼거리였다. 네티즌들 사이에선 극중 등장 인물들의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선들이 반상(盤上)에 투영, 시청자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단 평가도 적지 않았다. 이런 흐름에 K바둑계 살아 있는 전설인 조훈현(72) 9단과 이창호(50) 9단의 사제지간 관계를 그린 영화 ‘승부’(지난달 26일 개봉)가 합류할 태세다.
‘승부’가 개봉과 더불어 국내 극장가를 강타하고 있다. 지난달 28일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승부’는 전날 6만여 명(매출액 점유율 51.3%)이 관람,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개봉일인 지난 26일에 이어 이틀 연속 박스오피스 정상을 지켰다. ‘승부’는 조 9단과 이 9단 사이에서 벌어졌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됐다. 휴먼 드라마 형태인 ‘승부’엔 제자와 대결에서 패한 이후, 타고난 승부사 기질로 다시 한번 정상 도전에 나선 조 9단의 지독한 반상 여정이 담겼다. 특히 조 9단을 대신한 배우 이병헌이나 이 9단 역할로 나온 김강훈(유년)·유아인(성인) 연기의 주요 무대였던 바둑에 대해서도 스포트라이트가 쏠리고 있다.
이세돌(오른쪽) 9단이 지난 2016년 3월, 서울 광화문 포시즌스호텔에서 구글 인공지능(AI) 바둑 프로그램인 ‘알파고’와 대국을 벌이고 있다. 바둑계 안팎에선 "9년 전, 알파고와 이 9단이 벌였던 세기의 반상 대결에 힘입어 급상승한 바둑 인지도가 최근 ‘챗GPT’에 힘입어 불어 닥친 생성형 인공지능(AI) 열풍으로 인해 다시 회자되는 듯한 분위기이다"란 긍정적인 시각도 내놓고 있다. 한국기원 제공
이처럼 작품 속 전개 과정에서 극중 설정으로 등장, 긍정적인 효과를 더해준 바둑만의 특징은 뭘까. 바둑계 내부에선 ‘바둑은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일컬어진 세간의 시각과 무관치 않을 것이란 분석이 우세하다. 국내 최대 프로 기전인 ‘KB국민은행 바둑리그’에 참가 중인 한 중견 프로 바둑 기사는 “대국을 두다 보면 유리한 상황에서 평정심을 잃고 위기에 빠지기도 하고 폭망했던 순간엔 상대방의 실수로 기사회생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라며 “특히 대국 도중엔 지나친 과욕으로 전체 판세까지 그르치는 경우들이 허다한데, 이런 사례들이 굴곡진 삶을 그려낸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도 적절하게 비유적으로 구현되면서 대중에게 공감을 얻고 있는 것 같다”라고 전했다. 치열한 반상 전투에선 빈번하게 오고 가는 희로애락 감정 구간을 작품에선 등장 인물들의 심리 표현 공간으로 톡톡히 활용하고 있단 얘기였다.
일상 생활 속에서 이미 친숙해진 반상 용어들도 바둑과 대중 문화의 조합엔 디딤돌이란 시각이 나온다. KB리그에서 활약 중인 또 다른 프로 바둑 기사는 “묘수에서부터 꼼수와 악수, 무리수, 자충수, 승부수, (초)강수, 사활, 패착, 포석, 복기, 장고, 초읽기, 정석, 국면, 판세, 호구, 덤, 꽃놀이패, 입신(9단) 등을 비롯해 실생활 대화에서 자주 쓰이는 바둑 용어들이 알고 보면 꽤 많다”라며 “반상 용어들이 일상생활에서 많이 쓰인다는 것은 바둑과 인생이 닮았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기 때문에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바둑이 등장해도 생소함은 덜한 것으로 보인다”고 풀이했다.
이와 함께 요즘 대세인 ‘챗GPT’에 힘입어 불어 닥친 생성형 인공지능(AI) 바람도 일상생활 속의 바둑 인지도 향상엔 나쁠 게 없다는 기류도 감지된다. 바둑계 관계자는 “9년 전, 이세돌 9단과 맞대결을 벌였던 구글 AI 바둑 프로그램인 ‘알파고’ 덕분에 급상승한 바둑 이미지가 최근 생성형 AI 대중화 시대로 진입하면서 추가로 회자되는 듯한 현상도 고무적이다”라고 말했다.
올해로 80주년인 한국 현대 반상 역사에서 K바둑계는 천재 기사 계보를 이어오면서 세계 최강으로 군림하고 있다. 사진 맨 왼쪽부터 K현대바둑 개척자로 유명한 조남철(작고) 9단에서부터 김인(작고) 9단과 조훈현 9단, 이창호 9단, 이세돌 9단, 박정환 9단, 신진서 9단. 한국기원 제공
대국 종료 직전까지 이변이 속출할 가능성 역시 반상에서만 맛볼 수 있는 묘미다. ‘각본 없는 드라마’로 알려진 바둑에 대한 예측은 공허한 까닭이다. 바둑계 관계자는 “극단적인 예를 들어 축구에선 후반 종료 10초를 남겨둔 상태에서 10대0으로 이기고 있는 팀이 패배할 확률은 제로(0)에 가깝지만 바둑에선 게임이 완전히 끝나기 바로 직전까지 100집을 이기고 있어도 한 수만 삐끗하면 승패가 뒤바뀌는 경우가 흔하다”라며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란 역설적인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스포츠가 바둑이 아닌가 생각한다”라고 짚었다. 실전 대국에선 최종 착수를 놓는 시점에서조차 긴장의 끈을 놓아선 안 된단 설명이다.
올해로 80주년인 한국 현대 반상 역사에서 세계 최강 계보를 이어온 K바둑의 존재감 또한 흥행성 측면에선 플러스 요인이란 평가다. 실제 K현대바둑 개척자로 유명한 조남철(작고) 9단에서부터 김인(작고) 9단과 조훈현(72) 9단, 이창호(50) 9단, 이세돌(42·은퇴) 9단, 박정환(32) 9단 등을 거쳐 현재 세계 랭킹 1위인 신진서(25) 9단까지 당대 반상을 지배한 천재 기사들의 명맥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바둑계 안팎에선 “만약 한국 바둑계가 오랫동안 세계 대회에서 1인자 자리를 지켜내지 못했다면 바둑 소재의 드라마와 영화를 제작하긴 힘들었거나 제작됐더라도 보는 이들에게 큰 호응을 얻진 못했을 것이다”란 냉정한 관측도 제기되는 게 사실이다.
바둑계 내부에선 이번 기회를 자체 체급 상승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의견도 내놓고 있다. 한국기원 관계자는 “세계에서 가장 고차원적인 두뇌 스포츠로 알려진 바둑에 대한 호기심이 드라마나 영화 전개 과정 속에 오묘하게 스며들면서 바둑 소재의 드라마나 영화에 대한 세간의 관심도 높아지는 것처럼 보인다”라며 “이런 분위기를 이어가기 위해서라도 한국 바둑의 자체 경쟁력 확보와 80년 동안 이어온 세대교체 문제를 무리 없이 마무리하는 게 중요하다”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