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 결정 선고를 하루 앞둔 지난 3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인근과 안국역 앞이 경찰 차벽과 병력 등으로 통제되고 있다. 성동훈 기자
헌법재판소가 윤석열 전 대통령의 파면을 선고한 지난 4일 우려와 달리 폭력 사태 등 큰 충돌은 없었다. 8년 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심판 결정 선고일에 4명이 사망하고 수십명이 다친 것과는 달랐다. 경찰의 ‘진공상태’ 경비, 서울서부지법 난입·폭력 사태로 인한 위기감, 윤 전 대통령 지지자들의 느슨한 응집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평화롭게 갈등 상황이 마무리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진공상태’ ‘완충지대’ 사전 기획한 경찰
이번 헌재 탄핵 결정이 큰 소동 없이 끝난 데에는 무엇보다 경찰의 경비계획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가 많다. 경찰은 선고 당일 가장 높은 수준의 비상근무 체계인 ‘갑호 비상’을 발령했고, 헌재 반경 150m를 이른바 ‘진공상태’로 만들었다. 당초 인근 100m로 설정했던 진공상태 구역을 더 넓히는 강수를 쓴 것이다. 이 구역 내에서는 집회·시위가 전면 금지됐다. 헌재 정문 앞 인도는 헌재 관계자와 취재진 등을 제외하고 통행이 완전히 통제됐다. 이렇게 진공상태를 만들기 위해 경찰 버스 160여대, 차벽 트럭 20여대 등이 동원됐고 기동대 337개, 2만여명을 투입했다.
탄핵 찬성·반대 집회 현장 사이에 ‘완충구역’을 설정한 것도 양측의 충돌을 막는 데 주효했다는 평이 나온다. 탄핵 반대 집회가 열린 안국역 4·5번 출구 인근 경운·운니동 일대와 탄핵 찬성 집회가 열린 안국역 1·6번 출구 인근 관훈·안국동 일대 사이의 100~150m 가량 거리를 거대한 빈 공간으로 만들어 양측의 접촉을 원천 차단하는 식이다. 경찰 관계자는 “헌재 주변 등 주요 시설에 대한 진공 대책 계획이 안전하게 마무리됐고, 대국민 안전 메시지가 반복적으로 나가며 안전 대비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된 것 같다”고 말했다.
‘서부지법 난입·폭력’ 이후 몸 사린 극우
지난 1월19일 새벽 윤석열 전 대통령이 구속되자 지지자들이 서울서부지법에 난입해 난동을 부리고 있는 가운데 법원청사에서 경찰과 대치중이던 시위대가 경찰 진입에 놀라 도망가고 있다. 이준헌 기자
140명이 경찰에 입건된 ‘서울서부지법 난입·폭력 사태’가 반면교사가 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실제 선고 당일 폭력 사태를 우려한 탄핵 반대 집회 참가자 일부가 격앙된 일부 참가자를 말리는 모습이 보였다. 헌재 선고 직후 격분한 한 남성이 곤봉으로 경찰 차벽을 내리치자 함께 있던 시위대가 먼저 이 남성을 경찰버스로부터 떨어뜨리기도 했다. 한 탄핵 반대 집회 참가자가 경찰과 취재진을 향해 시비를 걸자 “흥분하면 안 된다. 좌파들이 또 폭도로 몰아간다”고 외치며 이들을 말리는 목소리도 나왔다.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는 선고 직후 집회 참가자들에게 “흥분을 가라앉혀라. 벌어진 일에 대해 폭력이나 이런 건 절대 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전 목사와 함께 있던 신혜식 신의한수 대표도 “폭력 사태를 이용해 전 목사를 내란범으로 모는 분위기가 감지된다”며 “억울하고 화 나도 질서를 유지해달라”고 했다. 경찰은 전 목사의 내란 선동 혐의와 관련해 수사를 이어가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지난달 31일 경찰청 정례 기자회견에서 “전 목사에 대한 고발인 조사와 참고인 조사를 모두 마쳤다”고 밝혔다.
교회, 유튜버, 정통 보수 뒤섞인 ‘느슨한 극우’
윤석열 대통령 탄핵 선고일인 4일 오전 서울 한남동 대통령 관저 입구에서 윤 대통령 지지자들이 헌재 선고 생중계를 보고 있다. 성동훈 기자
탄핵을 반대해온 윤 전 대통령 지지 세력이 느슨한 조직이라서 파면 결정 이후 목표를 잃고 결집이 흩어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추지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번 극우 세력은 조직된 전통적인 네트워크라기보다는 각자의 이해관계를 갖고 탄핵 반대 분위기에 편승하려는 약한 네트워크”라며 “그래서 파면 결정이 이후 곧바로 해산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재묵 한국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윤 전 대통령 파면 집회에 나왔던 이들을 살펴보면 보수정당 지지자, 교회 신자, 보수 유튜버 등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참여한 사람들”이라며 “애초에 느슨한 형식으로 조직됐고 목표가 달랐기 때문에, 윤 전 대통령 파면 이후 방향성을 잃어버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헌재 선고 내용 나오자 ‘승복’
파면 결정 직후 정치권과 윤 전 대통령 지지를 표명한 단체 등에서 “헌재 판결을 존중한다”는 입장이 잇따라 나온 것도 윤 전 대통령 지지자들의 ‘폭력 사태’로 이어지지 않게 한 것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국민의힘 지도부는 “헌재 결정을 무겁게 받아들이며 겸허하게 수용한다” 등 승복 입장을 밝혔다. 이어 탄핵 반대 집회를 이끌어온 개신교계 단체인 세이브코리아도 “대한민국의 일원으로서 오늘 헌재의 결정을 받아들인다”며 “어떤 경우에도 폭력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성명을 낸 뒤 지난 5일 열려던 집회를 취소했다. 윤 전 대통령 지지를 공개적으로 표명한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도 “헌재 선고 결과에 승복한다”고 유튜브 실시간 방송에서 말했다.
배시은 기자 sieunb@kyunghyang.com, 강한들 기자 handle@kyunghyang.com, 이예슬 기자 brightpear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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