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베러맨>
[김상목 기자]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980년대 초, 별 볼 일 없는 동네에 딱히 특별할 것 없어 뵈는 한 소년이 있었다. 여기저기 끼고 싶었지만, 공부도 축구에도 별다른 소질은 없어 보였다. 10대 전후 청소년에겐 치명타 격이다. 아빠는 집안 살림은 나 몰라라 하고 바깥으로 쏘다니며 초라한 무대에서 공연하며 잔돈이나 버는 무명 연예인이고, 집안 살림은 억척스럽게 아침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이 일 저 일 가리지 않고 바쁘게 일하는 엄마 몫이다. 그런 집안 형편이라 어린 소년에게 가장 가까운 벗은 늘 손자를 아끼는 할머니다. 조모와 손주는 함께 텔레비전 쇼 프로그램을 보면서 과자를 먹는 걸로 소일한다.
아빠는 집에 어쩌다 들르곤 하지만, 아들에겐 다정한 편이다. 부자는 함께 좋아하는 프랭크 시나트라 명곡 'My Way'를 종종 열창하곤 한다. 그러나 어느 날 아빠는 훌쩍 집을 나가 다신 돌아오지 않았다. 노래하고 춤추는 걸 좋아하던 소년은 10대 중반이 되자, 학교에서 요구하는 장래 적성과 진로 희망에 별 관심이 없었다. 낙제 수준의 성적에 주변 친구들을 둘러봐도 다들 별 희망 없이 근근이 살아갈 운명이 예정되어 있다. 그러던 참에 우연히 아이돌 그룹 추가 인원 공모 오디션 소식이 들어온다. 그렇게 운명처럼 소년은 '테이크 댓'의 막내로 합류한다.
한동안 무명생활을 전전했지만, 얼마 후 이제 '로비'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 소년이 속한 그룹은 영국 최고의 아이돌로 등극한다. 하지만 그룹 내 서열은 고정되어 있고 지금과 비교해 보수적인 당시 영국 사회 분위기에서 10대 우상인 아이돌 그룹에 요구되는 강한 통제에 반항하던 로비는 사고뭉치로 찍히며 매니저는 물론, 다른 구성원과 불화를 일으키고 끝내 탈퇴에 이른다. 그동안 억눌려 있던 끼를 오히려 발산할 기회로 삼은 그는 '관종'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발산하며 그룹 시절보다 오히려 더 큰 성공을 구가한다.
이제 테이크 댓보다 솔로 가수 로비 윌리엄스로 거대한 위상을 얻은 그이지만, 부와 명성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의 어릴 적부터의 상처와 불안은 지워지기는커녕, 더 심화해 간다. 영국을 넘어 전 세계 음반 시장을 석권하고, 수십만이 열광하는 대형 공연을 매진시키고, 엄청난 부와 헌신적인 연인을 두고도 로비의 공허함은 갈수록 극한으로 치닫는다. 과연 그는 자신과 사투를 극복할 수 있을까?
당대 톱스타의 결정적 순간들
![]() |
▲ <베러맨> 스틸 |
ⓒ CJ CGV㈜, 찬란 |
이 영화의 주인공은 로비 윌리엄스(1974 ~ )다. 1990년대 초중반, 미국에 뉴 키즈 온 더 블록이 있다면, 대서양 건너에는 테이크 댓이 있다 할 정도로 당대의 인기 아이돌이던 그룹에서도 1, 2위를 다투던 인기 구성원이었고, 솔로 활동을 시작한 후 그룹보다 더 큰 성공을 거두며 역대 영국 음악상 최다 수상 기록을 여전히 가질 만큼 단순한 인기 가수를 가뿐히 초월해 시대의 상징으로 우뚝 선 존재다. 당연히 <베러 맨> 이전에도 그를 중심으로 한 전기영화는 적지 않게 등장해 왔었다.
이미 상당한 고정 팬층을 보유한 데다가 평범한 이들 몇 곱절의 인생 역정을 보유한 인기 연예인의 화려한 성공담과 그 이면의 알려지지 않은 속사정은 영화화하기엔 무척 매력적인 소재일 수밖에 없다. 이미 이런 스타들의 전기물은 차례로 속속 등장하는 중이다. <베러맨> 역시 그런 흐름 일부에 불과해 보일 수 있다. 게다가 세계적 인기와 비교하면 국내에선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은 편인 주인공이다. 굳이 비슷한 작업이 쏟아지는 와중에 이 작품을 선택할 이유가 달리 있을까?
하지만 그런 기우는 영화가 시작되고 10분 남짓한 시간 전후로 눈 녹듯 사라질 테다. 영화는 이 악동 팝스타의 일대기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들을 솜씨 있게 압축하면서도 평범한 전기물에 갇히길 거부한다. 이미 그런 작업은 차고 넘치니 말이다. 대신에 정교하게 세공된 황금비율로 1/3은 팝 뮤지컬, 1/3은 뮤직 판타지, 1/3은 심리 스릴러를 조합해 극 중에서 주인공이 팬에게 선사하듯 최고의 '쇼'를 보여주고자 한다. 화면에서 펼쳐지는 현란한 무대는 곧바로 스크린을 통해 관객에게 마치 공연 실황과 연결된 확장 음악 드라마처럼 전달된다.
실제 로비 윌리엄스의 역사적 공연과 무대를 재현한 세트와 실제 자료 화면을 참조한 특수효과가 교묘하게 배합되어 관객을 시각적 황홀경으로 이끈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의 전작이 근대 서커스의 창시자 일대기를 구현한 <위대한 쇼맨>이란 점을 떠올린다면, 그야말로 지상 최고의 볼거리를 관객에게 제공하겠다는 비장한 결의 격이다. 그만큼 <베러맨>이 선물하는 감각적 체험은 어마어마하다. 그래서 대화면에 음향설계 잘 된 상영관이 필수다. 음악영화 아니던가.
철부지가 '어른'이 되는 과정
![]() |
▲ <베러맨> 스틸 |
ⓒ CJ CGV㈜, 찬란 |
분명히 로비 윌리엄스의 전기영화다. 실제로 본인의 동의 아래 음성이 사용된다. 하지만 화면에는 어디에도 '브릿팝'의 팬이라면 누구나 알 그의 얼굴이 드러나지 않는다. 이상한 일이다. 2시간 15분 내내 화면 속을 방방 뛰며 돌아다니는데 말이다. 대체 영화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분명히 '로비'는 이 영화의 주역이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등장하지 않는다. 미소년에서 섹시 아이콘으로 일세를 풍미한 주인공은 과연 어디에 숨은 걸까?
물론 주인공은 숨은 적이 없다. 항상 그는 정중앙에 자리하고 있다. 다만 실제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엔 마치 <혹성탈출>의 '시저'를 닮은 침팬지 얼굴이 떠억 하고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전 세계 영화 애호가들이 <베러맨> 예고편을 재생하다 <혹성탈출> 새 시리즈를 잘못 틀었나 혼란에 빠지곤 할 정도라니 말 다 했다.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짐작하기도 어려운 경우다. 하지만 기이한 일이다. 점점 위화감이 사라지고 침팬지 얼굴이 로비 윌리엄스로 보이니 말이다. 무슨 마법을 부린 것일까?
어느 순간 감독과 주인공의 의도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로비 윌리엄스는 어릴 적부터 자신이 늘 또래에서 뒤처지고 진화가 덜 된 것처럼 이상한 열등감에 휩싸여 있었다고 한다. 침팬지는 그런 자신의 처지를 자조하는 장치인 셈이다. 감독 입장으로 보자면, 누구나 다 아는 주인공의 얼굴 혹은 닮은 꼴 연기자를 투입하는 것보다 더 본질에 근접해 그의 일대기를 상상력 풍부하게 재현할 기회를 포착할 기회였을 것이다. 영화가 그저 눈요깃감에 그치지 않고 주인공이 화려한 성공 그늘에서 겪었던 젊은 날의 온갖 사건과 방황을 그리는 데에도 침팬지 얼굴은 성장형 캐릭터로 위력을 발휘한다.
영화 속에서 대중의 사랑을 받고 싶지만, 한편으론 그들 앞에 나서는 게 늘 공포 자체인 로비는 항상 어릴 적의 열등의식과 스타가 된 후 강박증에 내몰린다. 술과 마약으로 시름을 달래려 하지만, 이는 그저 찰나의 봉합에 불과하다. 처음엔 거대한 성공과 화려한 생활로 이를 해소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공허함만 남았다. 내면의 상처를 바깥에서 해결할 순 없는 것이다. 그렇게 피폐한 자신을 감추고 성공을 지키는 나날이 지속 가능할 리 없다. 위기는 계속 심화한다.
춤과 노래의 향연
![]() |
▲ <베러맨> 스틸 |
ⓒ CJ CGV㈜, 찬란 |
행복은 '파랑새'처럼 멀리 있지 않다. 거대한 성공에 도취한 로비는 자신을 잃어 간다. 성공하면 가족을 버린 아빠가 돌아올 줄 알았다. 내쫓기다시피 탈퇴한 예전 그룹에 복수할 줄 알았다. 하지만 다 헛된 일이다. 잘못을 깨달았지만 인정하는 건 쉽지 않다. 당대 최고의 스타이니까. 그러나 잘못을 겸허히 반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게 진정한 용기다. 로비는 자신을 변치 않고 믿어주고 지지하던 가족과 친구에게 돌아간다.
그런 로비 윌리엄스의 여정이 한 번은 진솔한 가족 드라마의 뭉클함으로, 다음번에는 눈부신 혼란의 판타지로 관객의 눈과 귀를 쏙 사로잡는다. 요즘 케이팝 트랙 뺨치도록 변화무쌍하게 쪼개고 섞이며 휘몰아치듯 속속 도착하다. 전설의 냅워스 공연 실황은 어느 틈에 로비의 무수한 적대적 자아와 사생결단의 혈투를 벌이는 콜로세움으로 변신하고, 세계 순회공연의 자극적 무대는 장면이 바뀌며 내밀한 가정사의 단락으로 전환한다. 단조로운 연대기가 아니라 상징적 표현주의 기법으로 주인공의 심리 상황을 묘사하는 현란한 연출 기법이다. 무수한 로비 윌리엄스의 히트곡과 명불허전 퍼포먼스는 덤이다.
여기에 당대 영국 대중음악계 풍경을 재연한 풍경도 이목을 잡아끌 만하다. 소년 그룹으로 테이크 댓이 있다면 소녀 그룹으로 스파이스 걸스가 동시대에 존재했다. 그 스파이스 걸스의 라이벌 중 하나이자 로비의 연인이던 니콜 애플턴이 소속된 '올 세인츠', 그리고 기묘한 우정을 이어가던 당대 최고의 인기 록그룹 '오아시스'의 갤러거 형제와의 인연도 깨알처럼 소개한다. 물론 게리 발로우를 비롯한 테이크 댓 구성원은 빠질 리 없다.
대개 록, 아니면 힙합 음악인들 위주로 영화화되곤 하는 대중음악 스타 전기물 중에서 드물게 팝스타의 알려지지 않은 삶을 엿볼 수 있는 작업이다. '아티스트'로 대접받는 이들에 비해 쇼 비즈니스의 도구로 취급되곤 하는 아이돌의 처지나 내면을 들여다보기엔 안성맞춤이다. 2020년대 국내 아이돌 업계와 지리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간격은 있지만, 본질에서 겹치는 부분이 제법 되기에 아이돌에 관심 많은 이들이라면 괜찮은 참고자료도 될법하다.
영화를 보면서 로비 윌리엄스의 팬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쉬웠다. 반대로 그의 팬이라면 최고의 선물이 될 작품이다. 대중가수, 아이돌의 팬이라면 공감할 지점이 참 많다. 물론 늦깎이로 '어른'이 되기 위해 분투하는 소년의 성장통으로 보기에도 안성맞춤이다. 감동적인 가족 스토리를 그다지 선호하진 않지만, 그 방면에도 제법 뭉클한 경지에 도달한다. 원래 'My Way'는 중장년들 허세나 부릴 때 애창곡이라 치부해 왔지만, 2001년 로비 윌리엄스의 런던 로얄 앨버트 홀 실황을 재연한 공연은 정말 멋지다. 영화의 여운이 남는다면 유튜브에서 한 번 검색해서 봐보시라. 로비 윌리엄스의 눈웃음에 포로가 되지 않고는 못 배길 테다.
<작품정보>
베러맨
Better Man
2024|영국, 중국, 미국|뮤직 판타지
2025.04.09. 개봉|136분|15세 관람가
감독 마이클 그레이시
출연 로비 윌리엄스(목소리), 조노 데이비스(모션 캡쳐)
수입/배급 CJ CGV㈜
공동배급 찬란
![]() |
▲ <베러맨> 포스터 |
ⓒ CJ CGV㈜, 찬란 |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