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 과학자에게 묻다] [5]
세계적 뇌과학 전문가 이대열 존스홉킨스대 의대 교수
이대열 존스홉킨스 의대 교수./이대열 교수 제공
인류는 인간의 뇌를 닮은 기계, 인공지능(AI) 시대의 서막을 열었다. AI는 과학기술을 뿌리부터 뒤바꿔 놓고 있지만, 알고리즘(사용자 맞춤 추천)이라는 형태로 인간의 사고를 지배하고 극단화시킨다는 비판을 받는다. 인류와 AI의 공존은 가능할까? 세계적 뇌과학 전문가 이대열(59) 존스홉킨스대 의대 교수는 “집단생활을 하는 포유류는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상대를 돕는다”며 “이런 이타성의 원리를 밝히면 인간에게 유익한 AI를 개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말한 근거는 무엇일까? 최근 그를 화상 인터뷰로 만났다.
−사람의 이타성을 도덕성이 아닌 뇌의 활동으로 설명하는 것이 흥미롭다.
“완벽하진 않지만, 인간의 뇌는 개인의 이기적 욕구와 사회성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능력이 있다. 이타성은 인간이나 동물의 행동 중 과학적으로 가장 규명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신경 과학자들이 이타성에 관한 연구를 시작한 지 대략 20년 정도 됐다. 최근에는 동물들이 위험에 처한 동료에게 마치 응급처치를 하는 것과 같은 행동을 할 때 시상하부와 편도체에 있는 신경세포들이 관여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반대로 인간이 자신의 피해를 감수하면서 누군가에게 복수를 할 때는 대뇌피질의 선조체 같은 뇌 영역이 활성화된다. 복수를 했을 때 통쾌함을 느끼는 것과 연관이 있다고 본다. 선조체는 자선 단체에 기부할 때도 활성화된다.”
−이런 뇌의 활동을 AI나 알고리즘에 적용할 수 있나.
“인간의 뇌가 작동하는 방식을 모방해 ‘인공신경망’을 만든 것이 AI의 시초다. 이타적 행동을 하는 뇌의 활동을 보다 정밀하게 규명하면, AI 알고리즘뿐 아니라 수많은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AI를 개발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보다 고차원의 지능을 갖춘 AI를 만들기 위해선 뇌를 더 들여다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AI 산업과 뇌과학은 다양한 협력 가능성이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아직 연구해야 할 게 너무 많지만, 이런 걸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의 뇌에서 이타적인 결정을 내리는 데 관련된 영역들이 상호작용을 하는 방식을 여러 가지 실험과 시뮬레이션을 통해서 확인하고, 그와 같은 신경망을 AI가 학습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후엔 AI가 학습을 통해서도 이를 바꿀 수 없도록 하는 방식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타성까지 갖춘 AI라면, 정말 인간과 같은 범용 AI라고 할 수 있지 않나?
“생명이 없는 AI는 진정한 의미의 ‘지능’을 갖췄다고 볼 수 없다. 지능은 생명체만이 가질 수 있는 ‘욕구’를 기반으로 진화한 능력이다. 생존에 대한 욕구, 후손을 남기려는 재생산의 욕구 등이 대표적이다. 이를 바탕으로 진화하면서 지능은 발전해 왔다. AI는 자신의 욕구를 기반으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방대한 지식을 잘 짜맞추고 줄줄 외우는 똑똑한 기계일 뿐이다.”
−AI가 사람의 학습과 연구를 대체하면서 인간 지능이 후퇴할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생물학적으로 뇌의 진화는 멈추지 않는다. 다만 환경에 따라 방향이 달라질 뿐이다. AI가 발전하며 인간의 뇌도 AI와 협업을 하는 등 상호작용을 더 하는 쪽으로 진화할 것이다. 이것이 꼭 지능의 후퇴라고 정의할 순 없다. 다만 뇌의 진화와 별개로 소셜미디어·매체의 AI 알고리즘 때문에 인간의 ‘확증 편향’이 더욱 심각해지고, 보다 극단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최근엔 어떤 연구를 하고 있나.
“원숭이에게 컴퓨터를 상대로 ‘4목’ 바둑을 두게 하고, 게임 중 뇌의 신경세포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이길 때 활성화되고 질 때 잠잠해지는 특정 뉴런(신경세포)이 있다. 이 뉴런은 상황의 유불리를 판단하는 기능이 있다. 이 뉴런을 이해하게 되면, 뇌의 의사 결정 원리를 알아낼 수 있다. 치매나 자폐 등 정신 질환 중 다수는 이런 의사 결정의 과정이 망가진 것이다. 뇌의 원리를 알면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 명확해진다. AI가 더 인간적인 사고를 할 수 있게 하는 데도 단서를 던져줄 수 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미키17’에는 인간을 완전 복제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건 불가능하다. 똑같은 뇌를 복제한다는 것은 그 뇌가 똑같은 의사 결정을 내린다는 의미인데, 99.9% 복제가 되어도 0.1%가 부족하면 뇌는 같은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 뇌의 일부를 복제하는 일이 기술적으로 가능하다고 해도 인간을 완전히 복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AI와 인간이 더 긴밀하게 상호작용하기 위해 머릿속에 칩을 심고 다녀야 한다는 일론 머스크의 주장은 일부 일리가 있다고 본다. 머스크의 ‘뉴럴링크’도 결국 뇌 신경세포의 활동을 제어하는 게 핵심이다.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 교수는 경제학·심리학의 의사 결정 이론과 뇌과학을 접목한 ‘신경경제학(Neuroeconomics)’을 개척한 인물로 꼽힌다. 어떤 특정 결정을 할 때 뇌 속의 뉴런이 어떻게 활동하는지 관찰하는 것이 그의 주된 연구 주제다. 뇌를 연구하는 과학자이지만, 학부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왔다.
−학부에선 경제학을 전공했는데, 왜 뇌과학자가 됐나.
“어렸을 때는 물리학자가 되는 게 꿈이었다. 경제학과에 진학한 이후에는 게임 이론 등 심리학과 관련된 것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인간의 사고와 감정이 모두 뇌의 작용이라는 것을 배우고 난 후부터 생물학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학부 졸업 전에 생물학 과목을 8과목 정도 수강했고, 한국고등교육재단의 지원을 받고 유학을 나오면서는 아예 전공을 생물학으로 정했다.”
−경제학에서 생물학으로의 변화가 순탄치만은 않았을 것 같다.
“고생을 꽤 했다(웃음). 특히 학부 시절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는 실험 리포트를 영어로 매주 써내야 하는 게 고통스러웠다. 다만 자신이 기초가 부족한 걸 계속 느끼게 되니 남들보다 훨씬 많은 노력을 하게 되더라. 이런 습관은 나중에 원숭이를 대상으로 복잡한 뇌의 의사 결정을 연구하는 신경경제학을 시작했을 때도 도움이 됐다. 당시 이 분야 연구자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남들보다 다양한 분야의 논문을 몇 배로 더 읽어가며 공부했다. 이 분야 연구를 시작한 지 25년이 됐는데, 과거의 고통이 어느 정도 자산이 된 것 같다.”
−미국에 비해 한국의 뇌과학 수준은 어떤가?
“뇌과학뿐 아니라 모든 학문 분야에서 한국의 가장 큰 약점은 환경이다. 무슨 연구를 하려고 해도 그 일을 할 만한 자원이 부족하다. 현재 한국에서 원숭이로 뇌를 연구하는 사람은 내가 있는 존스홉킨스 대학 1곳보다 적다. 학문을 유지하고 발전시키기에 한국은 아슬아슬한 수준에 걸쳐 있는 것이다.”
☞이대열 교수는
1989년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일리노이대에서 신경과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인간이 선택을 내릴 때 뇌의 뉴런(신경세포)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연구하는 신경경제학(Neuroeconomics) 분야 개척자로 꼽힌다. 인간이 비합리적 선택을 하는 이유를 뇌과학적으로 설명하며, 이를 통해 우울증, 중독, 강박 장애 등 정신 질환을 치료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미국 예일대를 거쳐 2019년부터 존스홉킨스 의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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