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대통령이 91년 11월1일 청와대에서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자문회의는 이날 기술개발복권 발행을 건의했다. 국가기록원
“과학기술 투자재원을 확대하기 위해 '기술개발복권'을 발행해야 합니다.”
1991년 11월 1일. 이날 오전 10시 청와대에서 열린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에서 김성진 위원장은 노태우 대통령에게 '과학기술진흥을 위한 정책보고'를 통해 이같이 건의했다.
“오는 2000년까지 10년간 과학기술 개발에 소요할 154조원 중 부족분인 39조원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과학기술세'를 신설하고 기술개발채권과 기술개발복권을 발행해야 합니다. 또 민간부문 투자를 늘리도록 기술개발금융지원을 전담할 '기술개발은행'을 설립하고 과학기술세로 확보한 자금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과학기술특별회계제도'를 도입하는 한편 경제기획원 예산실에 과학기술예산담당관을 신설해 줄 것을 건의합니다.”
국내 최초 기술개발복권 발행 신호탄이었다.
이날 회의에는 김성진 위원장과 조순 전 경제부총리, 최형섭 전 과학기술처 장관, 조완규 전 서울대 총장 등 자문위원들과 김진현 과학기술처 장관 등이 참석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보고받고 “건의한 사항은 경제기획원 장관을 중심으로 관계장관들이 긴밀히 협의해 연말에 구체적인 시행 방안을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과학기술 투자재원 확대를 위한 기술개발복권 발행 방안은 과학기술인들에게는 가뭄의 단비 같은 소식이었다. 하지만 세상일은 일방의 뜻대로 되지 않는 법. 과학기술세 신설, 기술개발은행 설립, 기술개발복권 발행 등은 부처 간 이해가 엇갈리는 중대사였다.
당장 야당인 민주당이 과학기술세 신설을 재검토하라고 주장했다.
노무현 당시 민주당 대변인(전 대통령)은 11월 6일 과학기술세 신설 움직임에 성명을 발표했다. 노 대변인은 성명에서 “정부의 국가첨단 기술개발 지원 정책에는 지지를 보내지만 재원은 조세체계의 단순화 원칙과 소득 재분배 기능에 역행하지 않는 방향으로 재검토해야 한다”면서 “과학기술세를 특별소비세나 유흥세에 부과하는 것은 과거 방위세처럼 간접세 비중을 높여 저소득 서민층의 세부담을 가중시킬 우려가 있다”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해 11월 20일. 민자당은 이날 당무회의에서 기술개발은행 대신 이와 유사 기능을 갖는 한국종합기술금융주식회사 설립을 위한 특별법(안)을 의원입법 형식으로 이번 정기국회에 제출키로 했다고 밝혔다. 기술개발은행 설립 대신 이미 설립한 한국기술개발주식회사 기능을 확대해 과학기술투자 재원을 마련키로 한 것이다.
민자당은 11월 21일 국회 경제과학위원회(경과위)에 이 법안을 제출했다. 대표발의자는 문희갑 민자당 의원(전 대구광역시장)이었다. 김영삼 의원(전 대통령)과 김재순(전 국회의장), 박태준(전 국무총리), 정몽준(현 아산재단 이사장), 나웅배, 서청원, 이원조, 김덕룡, 김용환, 유학성 의원 등 민자당 의원 30명이 법안에 서명했다.
그해 11월 25일 오후 5시 국회 경과위 회의장.
신순범 위원장이 개회를 선언했다.
“한국종합기술금융주식회사 법안을 상정합니다. 문희갑 의원 나오셔서 제안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문희갑 의원이 연단으로 나와 제안 설명을 했다.
“세계는 지금 과학기술 비중이 크게 높아짐에 따라 과학기술 개발과 기술보호 경쟁이 치열합니다. 정치 우방은 있어도 기술 우방은 없는 시대입니다. 21세기 우리나라가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려면 과학기술력이 획기적으로 발전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기술개발금융을 창조적이고 체계적으로 전담할 수 있는 특수은행이 필요하지만 여러 가지 여건상 설립이 어려워 지난 1981년 정부출연으로 설립한 한국기술개발주식회사를 확대 개편해 한국종합기술금융주식회사를 설립하는 것이 바람직해 이번에 법안을 제출한 것입니다. ”
문 의원의 제안 설명에 이어 이해찬 의원(전 국무총리)과 신영국 의원이 나와 질의를 했다. 이해찬 의원은 이 법안에 반대했다. 그는 당시 경과위 야당 간사였다.
이날 경과위에는 최각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과 김진현 과학기술처 장관, 강현욱 경제기획원 차관(전 농림수산부 장관), 박진호 과학기술처 기획관리실장(과학기술처 차관), 유희열 기술개발국장(전 과학기술처 차관) 등이 참석했다.
이 법안은 두 가지 장벽에 부딪혔다. 하나는 야당 반대였다.
김진현 과학기술처 장관의 회고.
“야당 간사가 법안에 반대하니 같은 야당인 위원장도 안건을 올리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열심히 이 의원을 설득했다. 마침 이 의원이 건강 문제로 병원에 입원하자 다시 그를 설득했다.”(대한민국 성찰의 기록)
유희열 전 기술개발국장의 증언.
“어느 날 이해찬 의원이 보이지 않아 수소문했다. 입원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김진현 장관이 입원실로 찾아가서 “내가 장관으로 하는 일인데 이것 하나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이 의원은 김 장관과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선후배 관계였다. 그는 상임위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말했다.이 말을 들은 여당 간사인 정몽준 의원이 급히 상임위를 소집해 이 법안을 처리했다.”(과학기술자의 피땀 눈물 그리고 환희)
남은 난관은 재무부 반대였다. 상임위를 통과한 법안은 재무부 반대로 법제사법위위원회(법사위)에 상정하지 못했다. 이른바 심사미료(未了)였다. 자칫 본회의 상정이 불발할 수 있었다.
김진현 장관이 재무부에 긴급 담판을 요청했다. 김 장관은 유희열 국장과 같이 이용만 재무부 장관을 만나 담판을 지었다. 그 자리에는 재무부 실무자도 참석했다.
김 장관이 '대한민국 성찰의 기록'에서 밝힌 내용.“기술개발복권은 결코 재무부 기존 권력을 침범하는 게 아니고 새 영역 개척이라는 점, 과학기술연구개발의 획기적 재원 마련이 필요한 점, 특히 기술벤처의 활성화를 위해 '종합기술금융' 발족이 필요하다는 점을 재무부 장관에게 이야기하며 간곡히 설득했다. 재무부 담당자는 여전히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듣기만 하던 이용만 장관이 실무자에게 '김 장관 도와주지'라고 한마디 하자 이 문제는 해결됐다. 바로 법사위에 재부부와 과기부 합의를 통고했다. 이 장관이 아니었으면 여명기 벤처산실인 종합기술금융과 기술개발복권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구체적인 기술개발복권 발행은 유희열 기술개발국장의 아이디어였다. 기존 한국기술개발회사를 특별법인인 한국종합기술금융주식회사로 강화하고 여기서 기술개발복권을 발행하자는 것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법안은 국회 본회의에 가까스로 상정했다.
그해 12월 17일 오후 10시. 국회 본회의장.
박준규 국회의장이 회의를 진행했다.
“한국종합기술금융주식회사 법안을 상정합니다. 경제과학위원회 김길홍 의원 나오셔서 심사 보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길홍 의원이 단상으로 나와 심사 보고를 했다.
”한국종합기술금융주식회사 법안은 원안대로 의결했습니다. 이 회사의 주요 사업은 기업의 기술개발과 성장에 필요한 투자와 융자, 기술과 경영 지도 등이며 투자와 융자 일정률 이상을 중소기업에 우선 지원토록 규정했습니다. 다만 이 법안의 시행일은 1992년 4월로 했지만 법인 청산에 3개월 시일이 더 필요해 시행일을 1992년 7월 1일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아무쪼록 경과위가 심사 보고한 대로 의결해 주시기 바랍니다.“
박준규 의장이 다시 회의를 진행했다.
“김 의원 심사 보고 중 시행일을 1992년 7월 1일로 해 달라는 내용은 소관 위원회 요청이므로 그 내용을 포함해 이의를 묻겠습니다. 이의 없으십니까. 그럼 표결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재석 200명 중 찬성 160명, 기권 40명으로 한국종합기술금융주식회사 법안을 가결했음을 선포합니다.”
이 법안은 29조 부칙으로 회사 자본금은 5000억원으로 하고 기술개발복권과 기술개발금융 채권 발행, 기술의 기술개발과 성장에 필요한 투자와 융자, 기업에 대한 기술과 경영지도,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또는 기업이 원하는 기술개발사업, 기타 기술개발과 관련한 사업으로 대통령령이 정하는 사업 등을 할 수 있도록 했다.
국회는 이 법안을 1991년 12월 24일 정부로 보냈다.
정부는 국무회의를 거쳐 1991년 한 해를 마감하는 12월 31일 법률 4491호로 한국종합기술금융주식회사법을 공포했다. 이 법은 1992년 7월 1일부터 시행했다. 사상 첫 기술개발복권 발행은 과학기술 투자의 새로운 정책 수단이었다.
이현덕 기자 hdlee@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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