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발전하면서 그래픽처리장치(GPU)와 데이터 센터 등 인프라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정부가 인공지능(AI) 인프라 구축 계획이 포함된 12조원 규모의 추가경정예산안(추경안)을 마련해 다음주 중 국회에 제출할 계획이다. 정치권의 이견으로 추경안 심사 과정에서 진통이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전 세계 AI 패권 경쟁이 심해지는 상황에서 국내 AI 경쟁력을 높이는 '골든타임'을 놓칠 수 있다는 지적이 지속되는 만큼 신속한 처리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15일 오전 정부서울청사에서 주재한 ‘경제관계장관회의 겸 산업경쟁력강화 관계장관회의’에서 “국회, 언론 등의 다양한 의견을 고려해 당초 말씀드렸던 10조원 규모보다 약 2조원 증액한 12조원대로 필수추경안을 편성하겠다”고 말했다.
정부는 예고한 대로 다음주 초 국회에 제출할 추경안을 통해 재해·재난 대응과 통상, AI 경쟁력 강화, 민생 지원에 중점을 두기로 했다. 추경안에는 대규모 재난재해 대응에 약 3조원, AI, 반도체 등 첨단산업 관련 인프라·금융·연구·개발(R&D) 등에 2조원 등을 투입하는 내용이 담긴다.
추경안은 정부가 편성하고 국회가 심의·확정한다. 국회는 정부가 추경안을 국회에 제출하면 23, 24일에 정책 질의를 진행하고 26, 27일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소위원회를 거친 뒤 4월 마지막 주에 전체회의를 열어 처리할 방침이다.
문제는 추경안 심사 과정에서 정부·정치권의 갈등이 예상된다는 점이다. 헌법상 국회가 예산을 증액 없이 감액만 하는 경우에는 정부 동의 없이 가능하다. 반면 국회가 예산을 늘리거나 새로운 예산 항목을 신설하려면 정부의 동의가 필요하다.
더불어민주당(민주당)은 발표 직후 즉시 증액 심사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은 민생회복지원금 등을 포함해 최대 35조원 규모의 ‘슈퍼 추경’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국민의힘 내부에서는 추경 규모를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과 증액 없이 정부 추경안을 빨리 통과시키는 게 중요하다는 주장 등 의견이 갈린다. 여야는 '재난 예비비' 추가 편성을 놓고도 대립하고 있다.
정부는 재정 건전성을 고려해 최소한만 확대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정부·정치권의 갈등이 봉합되지 않으면 추경안의 이달 통과가 어려울 수 있는 것이다. 이달 중 추경 심사를 마무리해도 3·4분기는 돼야 본격적인 예산 집행이 가능하다.
AI·반도체 업계를 포함한 과학기술계는 추경 예산 집행이 늦어지며 AI 인프라 구축이 늦어지는 점을 크게 우려하고 있다. 중국 '딥시크', 미국 '챗GPT' 등 등장을 계기로 국내 AI 산업 경쟁력이 크게 떨어지고 있다는 위기감이 크다. 미국 스탠퍼드대 인간중심AI연구소(HAI)는 최근 주목할 만한 AI 모델로 국내에서 유일하게 LG AI연구원의 엑사원 3.5만 선정했다. 전 세계에 내세울 수 있는 국내 AI 모델이 1개밖에 없는 것이다.
추경을 통해 구축할 대표적인 AI 인프라는 GPU(그래픽처리장치)다. 김정호 KAIST 전기및전자공학부 교수는 "국내 GPU 개수 자체가 부족해 경쟁력 있는 국내 AI 모델이 안 나오고 있다고 본다"며 "국내에 AI 연구자, 기업 등이 쓸 수 있는 GPU가 수만개는 확보돼야 한다"고 했다.
한국이 보유한 GPU는 엔비디아의 고성능 AI 반도체 ‘H100’를 비롯해 수천개인 것으로 알려진다. 오픈AI가 챗GPT4를 만드는데 사용된 GPU 개수가 1만5000개인 것을 감안하면 터무니없는 개수다. 마이크로소프트와 메타는 GPU 약 15만개를 보유하고 있다. H100 가격은 1개당 3000만원을 상회한다.
한국이 추경안으로 갈등하는 동안 전 세계 AI 패권 경쟁 속도는 나날이 빨라지고 있다. 유상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7일 월례브리핑에서 "올해 추경이 빨리 진행되지 않으면 올 한해가 GPU 보릿고개가 된다"며 "9개월만 지나도 AI 발전이 3년 뒤처지는 꼴이 되고 2030년까지 거의 따라잡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 GPU 확보 목표치는 지난 2월 과기정통부 발표 당시 연내 1만~1만 5000장, 내년 상반기까지 총 1만 8000장으로 조정됐다. 추경 상황에 따라 이마저도 불확실한 처지다. 일각에서 추경안에 엔비디아 GPU 외 AI 학습에 사용할 수 있는 국내 신경망처리장치(NPU) 확보도 담겨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세계 AI 시장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GPU 운영을 위한 네트워크, 소프트웨어 등 기반이 안정적인 엔비디아 GPU를 우선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 업계의 중론이다.
세계적인 GPU 수급난으로 각국 정부와 글로벌 빅테크들이 이미 엔비디아와 최우선 계약을 맺는 등 물량 확보에 달려들고 있다. 추경 예산이 집행되더라도 당장 GPU를 살 수 없을 정도로 경쟁이 치열한 것이다. GPU를 국내에 들여오더라도 운용 테스트를 하고 오류를 수정하는 시간이 걸린다.
전문가들은 국가 미래를 위해 반드시 자체적인 AI 인프라를 잘 갖춰야 한다는 의견이다. 김 교수는 "현재 국내 AI 기업은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등 글로벌 빅테크 통해 GPU를 빌려 사용하지만 갑자기 빅테크가 GPU 사용료를 높이거나 GPU 대여를 중단하면 AI 산업이 멈추게 된다"며 "AI 시장 장악은 시간 싸움이기 때문에 빠르게 추경을 통해 AI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채린 기자 rini11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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