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에 설치된 어웨이크(AWAKE) 실험장비. 플라즈마에서 레이저 펄스로 파도를 일으켜 전자를 가속시키는 방식이다. 소형 입자가속기에 응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CERN 제공
입자가속기는 초전도 자석 등으로 입자를 매우 빠르게 가속해 충돌시켜 우주의 기본 입자 등을 찾는 과학 실험 장치다. 2012년 이론적으로만 예측된 '힉스 입자'를 찾은 유럽의 길이 27킬로미터 거대강입자충돌기(LHC)가 대표적이다.
거대한 규모의 입자가속기와 달리 레이저로 수 센티미터~수 미터 길이에서 입자를 빠르게 가속해 강력한 충돌을 일으키는 방법에 대한 연구도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국제학술지 네이처는 14일(현지시간) LHC 등 기존 입자가속기보다 규모가 훨씬 작고 저렴한 입자가속기를 만들 수 있는 '항적장 가속(WakeField Acceleration)' 기술을 조명했다.
항적장 가속은 수상 레저인 웨이크보드와 비슷한 원리로 작동한다. 물 위에서 보트가 지나가면 보트의 진행 방향 뒤쪽으로 골과 마루가 있는 물의 파동이 생긴다. 이때 뒤따라오는 서퍼가 앞쪽으로 경사진 골 중간에 있으면 계속해서 앞쪽으로 떨어지면서 속도가 붙는 효과가 생긴다. 항적장 가속에서는 플라즈마가 물, 레이저 펄스는 보트, 전자가 서퍼 역할을 한다. 전자가 레이저 펄스 뒤를 오래 따라갈수록 가속이 많이 된다.
전자가 레이저 펄스를 뒤따라가며 수상 레저스포츠인 웨이크보드(Wakeboard)를 타듯 가속되는 항적장가속 원리. 김경택 교수 제공
미국 로렌스버클리 국립연구소 연구팀은 항적장 가속 방식으로 전자 에너지를 30센티미터 거리에서 100억전자볼트(eV, 에너지의 단위)까지 도달시키는 데 성공했다. LHC의 전신인 대형 전자-양전자 충돌기(LEP)의 빔이 27킬로미터 길이에서 달성한 에너지 크기의 약 10분의 1에 해당하는 값이다. 연구결과는 지난해 12월 18일(현지시간) 국제학술지 '피지컬 리뷰 레터스(PRL)'에 공개됐다.
김경택 광주과학기술원(GIST) 물리광과학과 교수는 "항적장 가속은 선형 가속기보다 구현할 수 있는 전자의 에너지와 입자 수는 상대적으로 낮지만 작은 규모와 저예산으로 정밀하게 실험할 수 있는 방법"이라며 "선형 가속기와 경쟁하거나 대체하기보다는 상보적인 관계"라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지난해 12월 출범한 기초과학연구원(IBS) '상대론적 레이저과학 연구단' 단장을 맡아 항적장 가속으로 전자를 레이저와 충돌시키는 실험을 진행할 예정이다.
항적장 가속 방식은 전자 충돌 실험 규모를 킬로미터 단위에서 미터 단위까지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다. 김 교수는 "20~30킬로미터 길이의 가속기 대신 조그만 빌딩 하나 정도면 된다"고 말했다.
9일(현지시간) 네이처에 공개된 연구결과에 따르면 독일 전자 싱크로트론(DESY) 연구팀은 항적장 가속으로 기존 가속기에서 생성되는 전자빔만큼 균일한 품질의 빔을 생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미래 원형 충돌기(FCC)의 대략적인 규모를 표현한 그림.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LHC 근처가 유력한 건설 장소로 제시됐다. CERN 제공
기존 입자가속기와 비슷한 세기를 구현한 항적장 가속 방식의 선형 가속기는 건설된 적 없다. 일부 과학자들은 유럽 입자물리연구소(CERN)가 만약 LHC의 후속 입자가속기를 LHC처럼 원형이 아닌 선형 가속기 형태로 짓는다면 항적장 가속 방식도 선택지가 될 것으로 예측한다. CERN은 아직 차세대 입자가속기 계획을 확정하지 않았다.
CERN의 최근 행보는 원형 가속기에 초점이 맞춰진 것으로 분석된다. 3월 31일 유럽 입자물리연구소(CERN)는 차세대 입자가속기 '미래 원형 충돌기(Future Circular Collider, FCC)'의 세부 계획을 발표했다. FCC는 LHC와 비슷하게 원형이지만 둘레가 91킬로미터로 LHC보다 3배 이상 큰 규모로 설계됐다. CERN은 FCC 세부 계획을 2026년 발표될 CERN의 장기 전략 검토에 참고 자료로 반영할 예정이다.
<참고 자료>
- doi.org/10.1103/PhysRevLett.133.255001
- doi.org/10.1038/s41586-025-08772-y
[이병구 기자 2bottle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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