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없는 친환경 마라톤인 ‘2025 무해런’이 23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한강공원에서 진행되고 있다. 각종 행사 물품은 다회용품과 재활용품을 활용했다. 한수빈 기자
급수대가 보인다. 속도를 늦추고 호흡을 고른다. 일회용 종이컵을 골라 쥐고 목을 축인 뒤 버린다. 잠시나마 프로 마라토너가 된 듯한 기분. 1분 1초가 아까운 능숙한 ‘러너’처럼 종이컵을 바닥에 팽개칠 때면 묘한 쾌감마저 느껴진다. 급수대 주변 컵 쓰레기 더미는 흐린 눈으로 지나친다. 마라톤 참가자라면 공감할 만한 풍경이다.
23일 서울 여의도 한강공원에서 열린 ‘2025 무해런’ 마라톤 대회는 달랐다. 일회용 컵도, 나뒹구는 컵 쓰레기도 보이지 않았다. 일회용 컵 자리에는 다회용 컵이 놓였고 사용한 컵은 수거함에 모였다.
‘국내 최초 쓰레기 없는 마라톤’을 내건 친환경 달리기 대회 ‘무해런’에 참여했다. 이날 ‘무해런’은 단일 종목 10km로 진행됐다. 여의도 한강공원 물빛무대 앞 광장에서부터 월드컵 대교 반환 지점까지 550여명이 뛰었다. 첫 대회였지만 SNS(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입소문이 나면서 참가 접수 4일 만에 마감됐다. 50장가량 나온 취소 표 역시 5분 만에 완판됐다.
‘일회용 종이컵 쓰레기’ 없는 친환경 대회
풀(42.195km)과 하프(21km), 10km, 5km 종목 등 구색을 갖춘 마라톤 대회 참가자는 통상 1만명 정도다. 1명이 물 한 잔만 마신다 해도 일회용 컵 1만개가 필요하다. 널리 알려진 ‘메이저’ 대회 참가자 규모는 3만명 수준인데, 일회용 컵 사용량 역시 3만개를 훌쩍 넘는다. 매년 국내 3대 마라톤 대회에서 버려지는 일회용 컵만 해도 최소 20만개가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쓰레기 없는 친환경 마라톤 ‘2025 무해런’에선 일회용 종이컵 대신 다회용 컵을 사용했다. 반기웅 기자
일회용 종이컵은 생산 단계부터 환경 영향 물질을 배출한다. 그린피스에 따르면, 종이컵을 한번 사용할 때마다 45.2g(CO2-Eq)의 온실가스가 배출된다. 국내에서 연간 쓰고 버려지는 종이컵은 37억개다. 해마다 종이컵으로 인해 1억6724만kg(CO2-Eq)의 탄소가 배출되는데, 자동차 6만2201대에서 나오는 탄소 배출량과 비슷한 수준이다.
꽃샘추위가 물러간 일요일. 초미세먼지 농도는 ‘나쁨’을 가리켰지만 볕이 따뜻했다. 덕분에 일회용 우의도 보이지 않았다. 이맘때 마라톤 대회 참가자들은 아침 추위를 피하려 일회용 우의를 입는다. 우의를 입고 뛰기 시작해 체온이 오르면 우의를 벗어 급수대나 길가에 버린다. 행사 요원이 우의를 수거하지만 참가자들이 사용한 ‘플라스틱 비닐’ 쓰레기는 남는다. 일회용 컵만큼이나 큰 골칫거리다.
쓰레기 없는 친환경 마라톤인 ‘2025 무해런’이 23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한강공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행사 기념 물품이 재사용 종이백이 담겨 있다. 한수빈 기자
‘무해런’ 대회에선 쓰레기를 줄이려는 운영진의 노력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포토월과 대회 행사 부스는 버려진 종이와 쇼핑백을 활용해 만들었다. 출발점과 골인 지점에 놓일 조형물도 폐기물이나 재활용품을 이용해 만든 ‘정크 아트’로 세워졌다.
물품 보관 봉투는 마트 종이봉투를 재활용했고 배번 표는 버려진 종이를 ‘업사이클링’해 만들었다. 이날 기자가 받은 배번은 190번. 보통 마라톤 대회에선 흰색 종이 배번 표를 쓰고 버리지만 작은 쓰레기조차 만들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기록 칩은 다회용이어서 발목에 묶고 달린 뒤 다시 주최 측에 반납했다. 한번 쓰고 찢어 버리면 되는 다른 기록 칩과 비교하면 번거로웠지만, 감수할 만한 불편이었다.
늘 죄책감 안고 달렸던 마라톤
“이번엔 마음 편히 달렸다”
이날 대회에서 제공된 음식도 비건 비빔밥과 비건 도넛, 비건 단백질 셰이크 등 ‘친환경’이었다. 기록을 인증하는 메달도 다 쓴 배번 표를 접어 만들었다. 모든 대회 물품은 현장 등록 부스에서 나눠줬다. 택배를 이용하지 않고 쓰레기 배출량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현장에서 물품을 주고받는데 시간이 조금 더 걸렸을 뿐 달리는데 불편은 없었다. 코스에 쓰레기가 보이지 않아 되레 상쾌했다.
쓰레기 없는 친환경 마라톤인 ‘2025 무해런’이 23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한강공원에서 진행되고 있다. 이루다씨가 재사용하는 기록판을 들고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한수빈 기자
이날 초등학교 4학년 딸과 함께 대회에 참가한 승혜영씨(45·경기 안양)는 “평소 환경에 관심이 많은데, 아이가 마라톤을 경험해보고 싶다고 해서 쓰레기 없는 마라톤을 첫 대회로 택했다”며 “앞으로도 이런 대회가 더 많이 열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루다씨(39·서울 강서)는 “평소 다른 마라톤 대회에서 종이컵 쓰레기를 보면서 마음이 무거웠는데, 이번 대회는 정말 마음이 편하다”고 말했다.
첫 대회를 마무리한 ‘무해런’은 계속된다. 대회를 준비한 황승용 ‘지구를 닦는 사람들’ 이사장은 “거대한 환경 문제에 맞서는 개인이 외롭지 않도록 응원하고자 마련한 대회”라며 “당장 해결되는 게 없어 기후 우울증과 무력감을 느끼는 분들에게 ‘무해런이라도 있어 다행’이라는 위로를 건네고 싶다”고 말했다.
반기웅 기자 b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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