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대통령의 독주와 헌재 선고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뜬금없는 ‘카르텔 타파’ 내세워 연구·개발 예산 삭감 강행…이후 복구됐지만 연구 현장엔 정책 불신 남겨
소통·토론·설득은 과학뿐 아니라 민주주의 기본 원리…대통령 독단 견제 못해 결국 비상계엄 야기
예상보다 헌재 판단 늦어지자 사회적 손해 심화…‘제왕적 통치행태’ 바로잡을 신속한 결정 기대
자연의 법칙을 연구하는 과학 활동은 흔히 가치 중립적이며 정치나 사회와 무관하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다. 과학 활동의 결과로 얻은 과학적 지식 자체는 하나의 객관적인 정보로서 그 어떤 정치사회적 가치도 갖지 않는다. 오직 과학적 가치만 가질 뿐이다. 그러나 과학 활동은 사람들이 사회 속에서 수행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정치사회적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우라늄235나 플루토늄239를 일정한 질량 이상 모으면 강력한 핵폭발이 일어난다는 진술은 하나의 유용한 정보로서 과학적 지식이다. 이 진술 자체에는 정치사회적 가치판단이 들어 있지 않다. 그러나 이 정보를 현실화하는 기술구현의 단계에서는 수많은 정치사회적 가치가 개입한다. 핵폭발의 원리를 처음 알아낸 과학자들조차도 실제 핵무기를 만들고 실전에 투하하는 과정에서 적잖은 가치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은 현재 NPT 체제 속에서 미국과의 한·미 원자력협정 때문에 우리 마음대로 핵물질을 과학 활동으로써 연구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이런 대외적인 환경 속에서 우리가 핵무기를 개발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는 아주 정치적이고 외교적인 문제이다.
정치사회적 현실이 과학 활동을 가장 극적으로 뒤바꾼 사례는 아마도 2차 세계대전이 아닐까 싶다. 1933년 독일에서 히틀러가 집권한 뒤 반유대정책을 펴자 수많은 과학자가 독일과 유럽을 떠나 미국에 자리를 잡았다. 이를 계기로 독일은 현대과학의 중심지라는 지위를 미국에 넘겨주게 되었다.
전쟁이 아니더라도 절대 권력이나 전체주의적인 통제체제는 과학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2000년을 이어온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관을 무너뜨리며 근대과학의 기틀을 다졌던 갈릴레오가 종교재판을 받은 사건은 이 점을 매우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나치에 맞서 핵무기 개발에 나섰던 맨해튼 프로젝트의 과학자들도 그랬다. 전체 프로젝트를 이끌었던 그로브스 장군은 로스앨러모스에 모인 과학자들을 군대의 규율에 따라 보안을 최우선으로 해서 통제하려고 했다. 과학 분야 책임자였던 오펜하이머는 이에 맞서 과학자들이 자유롭게 소통하고 토론할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최근 한국 과학계를 뒤흔든 가장 큰 사건은 아마 2023년 정부의 갑작스러운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이었을 것이다. 그 여파로 이듬해에 무려 1만2000여개의 과제 연구비가 삭감된 것으로 드러났다. 연구 현장은 물론 각계의 강력한 반발로 R&D 예산은 다시 복구되었으나, 모든 상황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중단된 연구를 다시 시작하기도 쉽지 않은 일인 데다 이미 현장을 떠난 연구자들을 돌이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정부 정책의 일관성에 대한 대내외적 불신은 앞으로도 계속 큰 상처로 남을 것이다. 그 모든 사달의 출발점은 윤석열 대통령의 뜬금없는 ‘R&D 카르텔 타파’라는 지시였다. 불과 석 달 전 국무회의에서 과기정통부가 발표한 국가 R&D 중장기 투자전략은 그 지시로 완전히 뒤집혔다.
국가의 미래가 걸린 중대사안을 이렇게 갑자기 자의적으로 뒤집는 행태는 절대 권력 체제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소통과 토론, 설득은 과학에서뿐 아니라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이기도 하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의 행정 수반이지만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방식은 절대군주나 독재자와 다르지 않았다. 손바닥에 ‘왕(王)자’를 쓰고 나왔던 윤 대통령은 정말 제왕이 되고 싶었던 것일까. 대통령 자신도 문제였거니와 그런 독단을 견제하고 바로잡을 기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우리 민주주의가 여전히 얼마나 취약한지를 드러냈다.
제왕적 통치행태의 정점은 역시나 12·3 비상계엄 선포로 내란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사실 왕조 국가의 제왕조차도 법을 어겨가면서까지 자기 마음대로 국정을 운영하지는 못한다. 12·3 비상계엄은 계엄 선포의 요건, 절차, 계엄실행의 모든 단계에서 법을 어겼다. 나는 법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지만, 그날의 사건이 문구로 적혀 있는 관련 법률조항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은 충분히 판단할 수 있다. 나뿐만 아니라 글을 읽을 수 있고 보통의 상식을 가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아마 비슷한 결론에 이를 것이다. 게다가 그날의 위법한 상황이 실시간으로 전 세계 사람들에게 생중계되지 않았던가. 이는 마치 깡패들의 폭행 현장이 CCTV에 그대로 찍힌 것과 다를 바 없다.
윤 대통령 측과 그 지지자들은 야당의 국정 발목잡기와 선관위 부정선거 의혹을 들어 계엄 선포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나는 야당의 이른바 ‘줄탄핵’과 예산삭감 등의 조치가 얼마나 국정을 마비시켰는지, 또 부정선거 의혹이 얼마나 진실에 가까운지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야당이 잘못해서 법을 어긴 사항이 있다면 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수사하고 기소해서 처벌하면 된다. 부정선거 의혹도 마찬가지이다. 야당이나 민주노총 또는 시민단체들이 나라를 외국에 팔아먹으려고 했다면 외환죄든, 간첩죄든, 국가보안법이든 적극적으로 적용해서 수사하면 된다. 윤 대통령은 검찰총장 시절에도 직속 상관의 자녀 일기장까지 뒤지는 전방위적인 수사로 결국 감옥에 넣지 않았던가. 지금은 그보다 훨씬 막강한 권한을 가진 대통령인데 야당이든, 선관위든, 시민단체든 죄를 지은 사람을 수사해 법정에 세우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굳이 절차와 요건을 어기면서 군대까지 동원해 불법적으로 헌법기관을 무력화하려 했는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이다. 제아무리 흉악하고 심각한 범죄를 저질렀더라도 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응징하는 법치주의가 작동해야 민주주의가 지켜진다. ‘반국가세력’을 척결하겠다고 해서 모든 수단과 방법이 정당화되는 게 아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자신에게 적대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과도 (법을 어기지 않았다면)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초법적인 방식으로 응징하기 시작하면 무법천지의 야만시대로 되돌아간다. 안타깝게도 윤 대통령의 초법적인 행위는 그 지지자들에게도 전해져 서부지법 폭동 사건으로까지 이어졌다. 벌써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승복하지 않겠다거나 심지어 헌재를 습격하고 재판관을 처단하겠다는 말까지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다. 우리는 지금 그 무법천지 야만의 시대로 한 걸음 들어가 있는 상태이다. 달리 말하자면, ‘내전’의 1단계로 이미 진입했다.
12·3 계엄을 통한 ‘내란’이 국회에서의 계엄 해제와 윤 대통령 탄핵 의결로 진압되지 않고 ‘내전’의 1단계로까지 전화한 데에는 내란을 진압해야 할 국가기관들(검찰이나 경찰, 법원을 포함해서)이 제 임무를 수행하지 않고 일부는 오히려 내란 세력의 편에 섰기 때문이다. 검찰과 법원은 환상적인 합작으로 구속 상태였던 윤 대통령을 풀어줬고, 영장 집행을 불법적으로 가로막았던 경호차장의 구속도 저지했다. 대행체제의 정부는 헌재에서 판결한 위헌적 상황(헌법재판관 임명 보류)을 아직도 자의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사실상의 내전 1단계를 빨리 종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헌재에서 하루빨리 윤 대통령의 파면을 선고하는 것이다. 수많은 법률전문가는 국회에서 윤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이후 헌재의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을 것이며 그 결과 또한 자명할 것으로 예상했다. 앞서 이미 말했듯이 ‘범죄의 현장’이 온 세상에 생중계되었기 때문이다.
현실은 전문가들의 예상과 완전히 달랐다. 더 자명할 수 없을 정도의 범죄사실을 두고 헌재는 사상 최장의 숙의 시간을 들여 선고를 늦추고 있다. 일각에서는 워낙 중대한 사안이라 가능한 모든 논란에 대비하느라 늦었다고 하지만, 이번 사건처럼 위헌 여부가 명확한 경우에는 오히려 그 역효과가 더 클 것이다. 그만큼 사실상의 헌정중단 기간이 늘어난 것도 문제이고 그 결과 온 국민과 국가 전체가 혼란의 시간을 더 겪어야 했다.
애초에 나는 이번 칼럼에서 우주의 암흑에너지와 관련된 최근 관측사실을 소개하려고 했었다. 그 대신 이렇게 나라를 걱정하는 글을 써야 한다는 사실 또한 늦어진 헌재의 판결이 초래한 사회적 손해 중 하나일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 내란에 동조하는 세력들은 헌재의 결정이 늦어진 만큼 그 결정에 승복하지 않는 자신들의 정당성이 더 커진다고 여길 것이다. 이는 곧 ‘내전 2단계’로의 진입 가능성을 그만큼 높이는 결과이기도 하다. 그뿐만 아니라 헌재의 늑장 판결은 ‘미래의 내란수괴’에게 대단히 부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한 셈이다. 12·3 내란 사태만큼 명명백백한 사건조차 헌재가 신속하게 처리하지 못한다면 미래의 내란수괴는 얼마나 속 편하게 내란을 획책하겠나.
이번에는 내란수괴가 ‘의원’을 ‘요원’이라 우기는 선에서 끝났지만, 훗날의 내란수괴는 아마도 계엄군의 국회 진입 영상조차도 딥페이크 기술을 활용한 가짜라고 우길지도 모른다. 또는 이번보다 더 심하게 헌재를 흔들고 재판관들을 협박해 변론과 숙의 과정도 왜곡하거나 심지어 내란이 실패해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될 경우까지 미리 고려해서 아예 선제적으로 헌재에 수를 써 놓을지도 모른다. 모르긴 몰라도, 헌재 판결이 하루씩 늦춰지는 동안 미래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최소 한 달, 아니 1년 이상씩 수명을 단축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제는 헌재가 윤 대통령 탄핵안 선고 결과를 조만간 내놓는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시기가 늦어진 만큼 헌재의 권위와 신뢰는 크게 손상되었고 새로운 갈등이 이미 시작되었다. 대한민국이 내전의 새 단계로 진입할 가능성이 그만큼 더 커졌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너무 늦은 판결은 판결이 아니었음을.
지금과 같은 혼란기 속의 하루는 미래의 1년 이상의 가치가 있다. 헌재의 신속한 파면 결정을 촉구한다.
이종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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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1990년 서울대 물리학과에 입학했으며 2001년 입자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연세대·고등과학원 등에서 연구원으로, 고려대에서 연구교수로 재직했다. 2016년부터 건국대 상허교양대학에서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신의 입자를 찾아서> <대통령을 위한 과학 에세이> <물리학 클래식> <이종필 교수의 인터스텔라> <빛의 속도로 이해하는 상대성이론> 등이 있고, <최종이론의 꿈> <블랙홀 전쟁> <물리의 정석> <스티븐 호킹의 블랙홀> 등을 우리글로 옮겼다.
이종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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