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서 요동백시(遼東白豕)라는 낱말을 만났습니다. 이익섭의 『우리말 산책』에서입니다. 양주동 박사가 살아생전 즐겨 썼다고 합니다. 옛날 중국 요동에 돼지를 키우며 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돼지가 하루는 머리가 하얀 새끼를 낳았습니다. 머리 하얀 돼지를 처음 본 것일까요? 저건 틀림없는 귀물이다 싶어 임금에게 바치겠다며 길을 나선 겁니다. 그런데 웬걸요. 하동(河東) 지방을 지나는데, 거기 돼지는 전부가 하얗지 뭡니까. 귀물은 폐물이 되어버렸습니다. 발길을 돌릴 밖에요.
견문 좁은 사람이 남은 다 아는 일을 혼자 아는 체하며 득의양양해하는 일을 두고 요동백시라고 한답니다. 고사가 있는 그대로 말뜻을 가리킵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올림말이 요동시로 되어있습니다. [견문이 좁아 세상일을 모르고 저 혼자 득의양양함을 이르는 말]이라고 뜻을 알립니다. 책과 사전은 행위로 풀었지만, 행위자로 풀어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헌재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 선고 기일 (PG) [김선영 제작] 사진합성·일러스트
누구나 요동백시가 될 수 있습니다. 한때 요동백시를 했을 테고 요동시였을 테고 이따금 여전할지 모릅니다. 견문이 좁은 탓만은 아닐 겁니다. 세상은 넓어 할 일도 많지만 모르는 것 투성이입니다. 견문은 늘 좁기만 합니다. 그것을 새기고 또 새겨야 현자입니다. 그러나 잊곤 하지요. 그때 요동백시 증상이 틀림없이 나타납니다. 경계해야 할 줄로 압니다.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가 곧 나옵니다. 사건번호는 '2024헌나8'이고 사건명은 '대통령(윤석열) 탄핵'입니다. 탄핵(彈劾)이 뭔가요? [죄상을 들어서 책망함]이 첫째 뜻이지만 [보통의 파면 절차에 의한 파면이 곤란하거나 검찰 기관에 의한 소추(訴追)가 사실상 곤란한 대통령·국무 위원·법관 등을 국회에서 소추하여 해임하거나 처벌하는 일 또는 그런 제도]라는 둘째 뜻이 이번 경우에 해당합니다. 파면해야 할 만큼 잘못이 크다고 보이는데 달리 방법이 없을 때 필요한 게 탄핵 제도입니다. 이 취지에 비추어 볼 때 먼저 고려할 사안은 탄핵소추나 탄핵의 많고적음일까요, 아니면 애초 파면해야 할 만큼 당사자가 무엇을 얼마나 잘못했는지 따지는 것일까요? 답은 자명합니다. 이걸 뒤늦게 알고서 아는 척하면 요동시 소리를 듣습니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기일 통지 헌법재판소 공문 [헌법재판소 제공]
1987년 민주화 이후 대통령 탄핵사(史)를 되돌아봅니다. 노무현 박근혜 윤석열, 이렇게 세 번이나 대통령이 탄핵소추됐고 한 번(박근혜)은 탄핵까지 됐다며 불행하다고 탄식합니다. 맞습니다. 불행합니다. 그런데 이들 사례를 대충 섞고 으깨고 버무려서 보는 것은 그 몇 배 불온합니다. 기자회견에서 여당 선거 지지 발언ㆍ'선거법 유감' 비판과 재신임 투표 제안(노무현), 최순실의 국정 개입 허용과 대통령 권한 남용ㆍ재단 설립에 대기업 출연금 강요(박근혜), 요건 안 맞는 비상계엄과 포고령ㆍ국회에 군경 투입ㆍ중앙선거관리위원회 압수수색 시도ㆍ주요 인사 체포 구금 지시(윤석열). 이들의 탄핵소추 또는 탄핵 핵심 사유와 쟁점입니다. 한눈에 경중이 가려집니다. 이걸 뒤늦게 알고서 아는 척하면 요동백시 되기 십상입니다. 헌재의 판단이 늦는다고 비판하는 시각이 이어졌습니다. 이 쉬운 판단을 지단(遲斷. 더딜 지, 판단 할 때 쓰는 끊을 단)한다는 생각에서였을 겁니다. 프랑스 축구 스타 지네딘 지단의 현역 시절 축구는 예술이었다고 팬들은 칭송합니다. 말놀이였습니다. (서울=연합뉴스, 고형규 기자, uni@yna.co.kr)
※ 이 글은 다음의 자료를 참고하여 작성했습니다.
1. 이익섭, 『우리말 산책』, 신구문화사, 2010 (p. 105-107, 어휘편 '요동백시' 부분 인용)
2.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온라인)
3. 네이버 고려대한국어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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